진짜 공주의 남자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참으로 많은 원한의 역사와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1) 비운의 경혜공주 이야기
2) 현덕왕후의 저주
3) 단종 혼령 이야기
4) 연산군 그리고 중종반정 등 드라마에서도 종종 나오는 소재입니다.
요새 '공주의 남자'란 드라마 역시 이 시대를 배경으로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더군요. 하지만 진짜 공주의 남자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정종이 그 인물입니다.
경혜공주와 결혼하여 한 나라의 부마가 되지만 억울하게 죽임까지 당하게 되는 분입니다.
한 많은 경혜공주의 삶을 간략히 살펴보면,
1) 비운의 경혜공주이야기(敬惠公主)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왕조국가에서 공주로 태어나는 것 이상의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의 손녀이자 문종의 딸인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인생은 보통 백성의 삶보다 훨씬 기구했다.
세종 18년(1436) 봄에 태어난 경혜공주는 일곱 살 때인 세종 23년(1441) 모친 권씨가 단종을 낳다가 사망하면서 권씨 집안의 여종인 어리니(於里尼)에 의해 길러졌다. 16세 때인 세종 32년(1450) 형조참판을 역임한 정충경(鄭忠敬)의 아들인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과 혼인하는데, 이 혼인 또한 비극으로 점철된다.
부왕 문종이 재위 2년(1452)만에 의문사한 것은 곧 불행으로의 초대장이었다. 만17세의 자신이나 만11세의 어린 동생(단종)이 숙부 수양의 야심을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단종 1년(1453) 수양은 김종서를 때려죽이는 이른바 계유정난이란 쿠데타를 일으켜 단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력을 장악했다. 공주 부부는 당연히 단종편에 설 수밖에 없었고 비극은 정해진 운명이 되었다.
수양은 단종을 지지하는 왕족들을 귀양보내면서 왕위를 내놓으라고 압박했는데, 단종을 키웠던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와 그 소생인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이 귀양가면서 영양위 정종도 영월로 귀양 가게 되었다. 두려움을 느낀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넘겼으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동생이 왕위를 빼앗기고 남편까지 귀양가자 공주는 병석에 눕는 것으로 항의했다. 상왕 단종은 세조 1년(1455) 윤6월 세조에게 사람을 보내 “영양위의 공주가 병석에 누웠다고 내게 고해왔는데 아마도 그 뜻은 영양위를 돌아오게 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상왕의 청탁을 받은 세조는 영양위를 서울로 불러들이는 시늉을 했다가 다시 수원과 통진으로 유배 보냈다. 그러자 공주는 남편을 따라 유배지로 갔다. 세조 2년(1456) 사육신 등이 동생을 복위시키려던 상왕복위기도사건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공주 부부의 처지는 더욱 궁박해졌다.
세조는 영양위 정종의 가산(家産)을 모두 몰수하고 그 종들까지 먼 지방의 종으로 보내 공주 부부의 수족을 잘랐다. 세조는 공주 부부를 전라도 광주로 이배(移配)시키고 재위 3년(1457) 10월에는 끝내 단종을 죽여 버리고 공주를 더욱 핍박했다.
공주의 유배지에는 목책이 설치되었으며 문은 항상 자물쇠로 잠겼고 열흘에 한 차례씩만 식량이 공급되었다. 집 안에 우물을 파서 일체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런 상황에서 영양위 정종은 두려움에 떨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세조 7년(1461) 7월 승려 성탄(性坦) 등을 유배지에 불러들였다는 이유로 의금부로 끌려와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 “나는 충신이다”라고 말했다고 『세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세조는 그해 10월 친형 문종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카 사위 정종의 목숨을 빼앗고 공주를 순천의 관비(官婢)로 떨어뜨렸다.
극귀(極貴)의 신분에서 가장 천한 관비로 전락했으나 공주는 굴하지 않았다. 『연려실기술』에는 이때 수령이 사역을 시키려 하자 공주가 대청 의자에 앉아 “나는 왕의 딸이다……어찌 감히 내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다는 말이냐?”라고 꾸짖었다고 전하고 있다. 관비로 전락했을 때 공주는 임신 중이었는데 경혜공주의 존재 자체가 세조 정권의 큰 부담이었다.
야사에는 세조가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지시했는데 정희왕후 윤씨가 여장(女裝)으로 위장해 살렸다고 전할 정도로 문종의 유일한 핏줄에게 가해진 탄압은 도를 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주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세조 정권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결국 세조는 공주가 서울에서 살아도 좋다고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공주는 살아남아 1남1녀를 길렀다. 성종 때 문신 이승소(李承召)가 쓴 『경혜공주 묘지(敬惠公主墓誌)』는 ‘공주는 모든 곤욕을 맛보았다……불평하는 기색도 없었다’고 적고 있다. 공주는 성종 4년(1473) 만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공주의 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악귀(惡鬼)같은 삼촌을 만나 온갖 곤욕과 슬픔을 다 맛본 경혜공주의 일생은 그래서 필부의 보통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말해준다.
참으로 억울하고 한 많은 삶이 점철된 분이었습니다. 단종과 경혜공주가 저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 두분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한은 어떠했을까요? (충격대예언 사이트 http://www.choonggyuk.com / 에 현덕왕후를 검색해보시면 2)현덕왕후께서 세조에게 내린 저주이야기와 3) 단종의 혼령이야기를 검색하실 수 있으실겁니다.)
4) 아이러니하게도 수양대군의 증손자 - 연산군- 역시 중종에 의해 왕위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조선의 역사만큼 형제가 형제를 죽이던 역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역시 이성계가 왕씨를 몰살시키고자 바닷물에 수장했을 때 왕건이 이성계에게 내린 저주라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