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사랑엔 인종 없다” 법적 인정 받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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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네 백인남성과 사랑에 빠져
결혼 5주째 버지니아주 징역형
1967년 연방大法서 위헌 판결
[사회문화]“사랑엔 인종 없다” 법적 인정 받아내 1958년 7월 11일 밤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리처드 러빙, 밀드레드 러빙 씨 부부의 침실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25세의 남편 러빙 씨는 백인, 18세의 부인은 인디언 피가 섞인 흑인이었다.
결혼 5주째의 이 신혼부부는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한 주 법률 위반 혐의로 연행됐다. 주 법원은 두 사람에게 1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미국 인권운동사에 큰 획을 남긴 ‘러빙 대(對) 버지니아 주’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오랜 법정투쟁 끝에 1967년 ‘인종 간 결혼 금지는 위헌’이란 연방대법원 판결을 받아냈던 밀드레드 러빙 씨가 2일 버지니아 주 자택에서 6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고 미국 언론들이 6일 뒤늦게 전했다.
러빙 씨 부부는 10대 때 한 동네에 살면서 사랑에 빠졌고 밀드레드 씨가 임신하자 결혼을 결정했다. 미국 내 상당수 주는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던 때였다. 인종 간 결혼 금지법이 없는 워싱턴에 가서 혼인신고를 한 뒤 고향에 돌아왔다가 체포된 것이다.
징역형을 면제받는 대신 추방명령을 받은 부부는 워싱턴으로 갔다. 러빙 씨는 벽돌공으로 일하며 아내와 2남 1녀를 부양했다. 결혼생활은 행복했지만 둘은 향수에 시달렸다. 결국 고향에서 살 자격을 얻기 위해 주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주 법원 판사는 “신은 각각의 인종이 각기 다른 대륙에 살게 하셨다. 이는 인종이 섞이게 할 의도가 없으셨음을 나타낸다”며 유죄 판결을 재확인했다.
부부는 사건을 연방대법원까지 끌고 갔다. 마침내 1967년 대법원은 “인종을 이유로 시민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며 인종 간 결혼 금지법에 위헌 판결을 내렸다. 만장일치였다.
고향에 돌아온 남편 러빙 씨는 1975년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밀드레드 씨는 재가하지 않고 고향에서 살면서 8명의 손자와 11명의 증손자를 뒀다.
미국에서 인종 간 결혼 금지법은 1600년대로 거슬러간다. 버지니아 주도 1662년 해당 법을 만들었다. 1948년 캘리포니아 주 대법원이 처음으로 인종 간 결혼 금지를 폐지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67년엔 연방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2000년 앨라배마 주가 마지막으로 이를 폐지할 때까지 일부 주에선 인종 간 결혼이 계속 금지됐다.
[사회문화]“사랑엔 인종 없다” 법적 인정 받아내 세상은 바뀌어 오늘날에는 케냐 출신 흑인 남성과 캔자스 출신 백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유력한 대선 주자로 뛰고 있다. 1961년 오바마의 어머니가 오바마를 임신한 상태로 결혼할 당시 하와이에서는 인종 간 결혼이 허용됐지만 상당수의 다른 주에선 불법이었다.
현재 연간 5900만 쌍에 달하는 미국 내 결혼 가운데 인종 간 결혼은 7% 정도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