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의 저주’ 어디까지 사실일까 ?
투탕카멘의 미스터리, 과학으로 밝혀내기
이집트의 소년 파라오 투탕카멘이 요즘 다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의 미라가 3300여년이나 지켜오던 왕묘에서 나와 CT 촬영과 DNA 검사를 받을 예정이기 때문. 더구나 이번 검사의 목적은 투탕카멘의 정확한 사망 원인을 밝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의 죽음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기에 이집트 당국은 보존 가치가 높은 미라에 대해 정밀 검사를 허용한 것일까. 또 현대 과학은 말라붙은 미라만으로 과연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까.
△후세에 더 유명해진 파라오
투탕카멘은 고대 이집트 18왕조 12대 왕으로서, 9살에 즉위하여 18세에 요절했다. 재위 기간이 겨우 9년에 불과하며 훌륭한 치적을 남긴 것도 아닌데, 유명해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무덤에서 나온 엄청난 유물 때문이다. 110kg의 황금관과 황금가면 등 호화찬란한 금은보화 및 3천여년 동안 마르지 않은 향료 등 3천 500여점의 귀중한 유물이 나왔다. 오늘날 카이로 박물관의 주요 소장품이 대부분 그의 무덤에서 나온 발굴품일 정도다. 파라오의 무덤이 모여 있는 ‘왕들의 골짜기’에서 도굴 당하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된 왕묘는 투탕카멘의 무덤이 유일하다.
둘째, 그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 때문이다. 18세의 젊은 나이에 후손도 남기지 않은 왕의 갑작스런 죽음 자체가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킬 소재로 충분하다. 투탕카멘의 왕비인 안케센아멘과 결혼한 총리대신 아이에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안케센아멘은 새 남편을 범인으로 의심하는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또 두개골이 손상된 것으로 나타난 투탕카멘의 X-선 사진은 타살설의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무덤 발굴에 간여한 사람들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퍼진 ‘미라의 저주’라는 괴이한 소문 덕분이다. 발굴 다음해인 1923년 발굴을 진행한 영국 귀족 조지 카나번이 갑작스레 죽은 걸 시작으로 무덤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 원인불명의 병이나 사고 등으로 세상을 뜨자, 투탕카멘의 저주 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 소문은 불분명한 사망원인과 맞물려 투탕카멘을 대중적 신화의 주인공으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미라의 저주’ 어디까지 사실일까
“죽음은 그 날개로 파라오의 평안을 교란시키는 자를 모두 죽이리라.”
투탕카멘의 무덤을 처음 발굴한 하워드 카터는 미라가 안치된 방 입구에서 위의 글귀가 적힌 점토판을 발견하고는 얼른 숨겼다. 현지인으로 구성된 작업 인부들이 알면 동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미라의 저주’의 단초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사건은 첫 발굴 후 5개월이 지난 무렵에 시작되었다. 하워드 카터를 고용하여 발굴을 진행한 조지 카나번이 말라리아모기에 물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 공교롭게도 카나번이 모기에 물린 곳은 투탕카멘의 얼굴에 나 있는 상처와 똑같은 부위였다. 또 카나번이 죽던 시간에 멀리 영국에 있던 그의 애완견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죽고 말았다.
무덤에 출입했던 고고학자가 호텔에서 사망하고, 미국 철도계의 거물 제이 굴드가 무덤을 시찰한 후 고열로 하룻밤만에 죽어버렸다. 그 후에도 카터의 비서 등 무덤에 관련된 사람의 사망이 1929년까지 22명으로 늘어났다. ‘미라의 저주’에 대한 뜬소문이 눈덩어리처럼 불어나자 급기야 과학적인 설명까지 덧붙여졌다.
투탕카멘과 함께 묻힌 과일과 야채 등이 수천 년 동안 썩으면서 생긴 곰팡이가 무덤이 열리자 재빨리 인체에 침입한 후 치명적인 질병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또 일부 학자들은 독약 전문가인 이집트인들이 피부에 스며들기만 해도 치명적인 독을 무덤 안의 벽에 칠해놓았다고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발굴 작업에 관련된 사람 1천5백여 명 중 10년 이내에 사망한 사람은 21명에 불과했다. 더구나 투탕카멘의 무덤을 최초로 개봉하고 줄곧 발굴 작업을 한 당사자인 카터는 18년을 멀쩡하게 살다가 66세의 나이로 자연사했다. 결국 그들의 죽음은 ‘미라의 저주’와는 상관없는 우연한 죽음이었던 것이다.